모퉁이로 내밀린 아시안(1) 지워질 뻔한 묫자리…굴곡의 땅 지켜낸 이민자
인간은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 묘지는 삶이 마지막으로 다다르는 곳이다. 묘비는 이야기다. 인생을 함축한 흔적이다. 후세는 거기에서 앞서간 이들을 기린다. 이 당연한 일이 아시안에겐 사치였다. 이방인으로 여겨진 이민자는 죽어서도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오리건주 포틀랜드에는 아시아계 이민자의 그늘진 역사가 있다. 서러운 망자들의 이야기가 영원히 지워질 뻔했던 곳이다. 포틀랜드의 하늘은 푸른색을 잃었다. 땅은 부슬비로 젖고 있다. 파란 풀 내음만 도드라진다. 21일 오전 10시, 포틀랜드의 론 퍼(Lone Fir) 묘지다. 1855년 조성된 이곳(약 30에이커)엔 2만 명 이상이 잠들어 있다. 진녹색 이끼가 묘비에 새겨진 이름마저 가렸다. 육중한 시간의 무게를 품은 공간이다. 빈 땅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득한 잿빛 묘비들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가까이 가니 손바닥 두 개 크기 정도의 돌 표식(사진)이 땅의 존재를 알린다. 'Block 14'. 돌 표식은 무성한 잡초 사이에 박혀 있다. 무릎을 꿇고 봐야 할 정도다. 표지판이 뒤에 세워져 있다. '이곳은 버려진 땅이 아닙니다. (This is not an empty field)' 현재 론 퍼 묘지의 땅은 오리건주 정부 기관인 메트로(Metro) 소유다. 메트로의 한나 에릭슨 마케팅 담당자는 "한때 이곳은 한자가 새겨진 묘비석으로 붐볐던 구역"이라고 소개했다. 한자는 곧 중국계를 가리킨다. 그는 이어 "14구역은 1867년부터 1927년까지 오리건주에서 철도 노동, 통조림 공장, 광산, 농장 등에서 일했던 중국계 이민자 2892명이 묻혔던 장소"라고 말했다. 철조망 너머는 찻길이다. 모리슨 스트리트와 20가 교차로에 있는 14구역(약 1에이커)은 론 퍼 묘지에서 남서쪽 끄트머리에 있다. 가장 구석진 자리다. 오전 11시, 고요했던 이곳에 하나둘씩 주민이 몰려들었다. 메트로가 오리건중국인통합자선협회(CCBA), 중국계미국인시민연합(CACA) 등과 함께 진행하는 공청회에 온 이들이다. 이곳에는 2026년 완공을 목표로 추모 정원이 조성된다. 공청회는 정원 디자인 두 개를 놓고 의견을 수렴하는 자리다. 이 프로젝트는 지난 2019년 유권자들이 채권 발행을 승인하면서 메트로가 400만 달러를 투입,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14구역은 굴곡의 땅이다. 1948년이었다. 론 퍼 묘지를 소유했던 멀트노마 카운티 정부가 구획 변경을 위해 CCBA에 유해 발굴을 요청한 뒤 땅을 갈아엎었다. 당시 256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카운티 정부는 더는 유해가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 위로 정부 건물(모리슨 빌딩.1953년 완공)과 주차장이 들어섰다. 14구역은 건물이 철거(2005년)되기까지 무려 50년 이상 콘크리트로 덮여 있었다. 카운티 정부는 지난 1997년 14구역 부지만 제외하고 묘지 소유권을 메트로에 넘겼다. 이어 2004년에 이곳에 있던 정부 건물을 허물고 콘도 단지 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이번엔 중국인 커뮤니티가 가만있지 않았다. 포틀랜드리패밀리협회 마커스 리(70) 이사는 중국계 혼혈로 4세대 이민자다. 추모 정원은 중국계 커뮤니티의 숙원이었다. 이민 선조의 역사를 보존하려는 열망이었다. 그는 "중국인 커뮤니티가 모두 나서 '유골이 남아 있을 수 있다'며 부지 개발을 강력히 반대했다"고 말했다. 역사가 두 번이나 지워지는 것을 바라만 볼 수 없었다. 땅을 지켜내야 했다. 포틀랜드 지역 CCBA는 설립(1890년) 때부터 중국인 이민자들의 매장을 도왔다. 전통 관습에 따라 유해를 상자에 담아 고국에 보내는 일도 했다. 14구역에 아직도 유해가 남아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건 기록뿐이다. CCBA 닐 리 회장은 "포틀랜드엔 1800~1900년대 서부에서 두 번째로 큰 중국인 커뮤니티가 형성돼 있었다"며 "우리 단체는 역사적으로 장례를 도왔기 때문에 이곳에 묻혔던 중국인 이민자들의 목록을 모두 보관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카운티 정부는 반발을 외면할 수 없었다. 지난 2005년 1월 자체적으로 전문가들을 섭외해 고고학 분석을 진행했다. 중국계 커뮤니티의 주장이 결국 옳았다. 한자가 새겨진 도자기 및 묘비 조각 등 유물은 물론이고, 더는 없을 것이라던 유해까지 발견됐다. CACA 헬렌 잉 회장은 "그때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유해가 나왔다"며 "이는 14구역 개발이 중단돼야 한다는 점을 모두에게 확인시켰다"고 말했다. 그 순간부터 이곳은 개발이 아닌 보존 돼야 할 땅이 됐다. 카운티 정부는 즉각 개발 계획을 중단했다. 14구역의 소유권도 메트로에 넘겼다. 2007년의 일이다. 에릭슨 마케팅 담당자는 "14구역 이야기는 미국 역사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차별과 그들의 공헌이 지워지는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며 "추모 정원 프로젝트는 어쩌면 역사가 지워지지 않게 하는 방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공청회에는 지역 정치인과 주민 등 50여 명이 참석했다. 메모지에 주민들이 손수 세세하게 적은 의견들을 살펴봤다. 알로(Arlo)라는 다섯 살짜리 아이는 작은 손으로 이렇게 썼다. '뭔가 아이들도 놀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좋겠어요.' 아시안의 묫자리는 가장자리였다. 그렇다고 삶까지 모퉁이는 아니다. 그들의 이야기 역시 존중받아야 할 미국의 역사다. 관련기사 보는 이 없는 기록물…낡은 벽이 이민사 전시장 포틀랜드=장열 기자ㆍ사진 김상진 기자 [email protected] 이민자 포틀랜드 오리건주 포틀랜드 아시아계 이민자